[명작의 숨은 이야기] 한 서양인 남성 화가의 눈에 비친 중국 황후 – 서태후 초상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 <서태후 초상>, 1905-06년, 캔버스에 유채, 169.6 x 123.6 cm, 하버드대학교 포그 미술관

당나라의 측천무후와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여성 권력자였던 서태후(西太后, 1835-1908). 청나라 말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을 통치했던 그녀를 역사는 잔인한 폭정을 일삼는 악녀로 평가해 왔다. 하지만 한 서양인 남자가 그린 초상화 속 그녀는 7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눈빛과 표정이 살아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여인의 모습이다. 

중국의 최고 통치자를 그린 화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다.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인 화가로 1898년 서울을 방문하면서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

보스가 서태후의 초상화를 그린 첫 서양인 화가는 아니다. 그 이전에 미국인 여성 화가 캐서린 칼(Katherine Carl,  1865-1938)이 유화로 황후의 초상화를 그렸다. 보스는 칼에 이어 두번째이며, 남성 화가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서태후를 직접 보고 초상화를 그린 화가다. 

캐서린 칼, <서태후 초상>, 1904년, 워싱턴 아서 M. 새클러 갤러리

보스는 두 점의 서태후 초상화를 남겼다. 황후가 주문했던 초상화 한 점은 현재 북경의 이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하버드대학교 포그 미술관에 있는 <서태후 초상>은 1906년 보스가 뉴욕으로 돌아가 완성한 것으로 황후가 직접 주문한 그림이 아니다. 더구나 그녀는 살아생전에 두번째 초상화를 보지도, 알지도 못했다.

휴버트 보스, <서태후 초상>, 1905년, 캔버스에 유채, 북경 이화원

이화원에 남겨진 초상화는 보스가 서태후의 요구와 의견을 적극 반영하여 그린 작품이다. 서양식으로 캔버스에 그린 유화이지만 청나라 황실의 초상화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전신 정면상에 정확한 좌우 대칭구도와 딱딱하고 건조한 스타일까지. 무엇보다도 30대 젊은 여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황후는 주름이나 눈 밑의 그림자 하나 없이 매끈하게 표현되었다. 서태후는 초상화 속 자신의 모습에 무척 만족했다고 한다. 

보스가 그린 두번째 초상화는 북경에서 작업을 할 때 쓴 스케치를 바탕으로 하여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서양인들에게 서태후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보스는 이 작품을 1906년에 열린 파리 살롱(미술전)에 출품했다. 

첫번째 초상화와 마찬가지로 서태후는 정면을 바라보며 부채를 들고 앉아 있다. 그러나 초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고 신비스럽다. 뒷배경에는 자욱한 구름 사이로 날아 다니는 거대한 용 한 마리가 그려져 있는데, 서태후를 둘러싼 강렬한 기운을 말해주는 듯하다. 어둡고 흐린 배경은 그녀의 화려한 의상와 장신구를 더욱 돋보이게 해주며 보다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게끔 한다.

보스는 이 작품에서 70세의 서태후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황후의 얼굴은 주름지고 눈가에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지만, 세월과 연륜이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은 근엄하고 품위가 있다. 

보스가 만난 서태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태후를 직접 보고 작업했던 두 명의 서양인 화가는 그녀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들의 눈에 서태후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악랄한 여인이 아니었으며 청나라를 구렁텅이에 빠지게 한 무능력한 지도자도 아니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시대 유럽 열강은 중국의 최고 ‘여성’ 통치자인 서태후에게 막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1861년 섭정으로 권력을 쥔 후 1908년 세상을 뜰 때까지 서태후를 향한 서양인들의 시선은 부정적이다 못해 잔혹했다.

특히 서태후가 반외세 의화단(義和團)진압에 적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활동을 지원하고 서양 연합세력에 대항하자 그들은 그녀를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반세기 동안 정권을 지키며 곧 무너질 것 같은 청제국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는 서태후가 열강의 마음에 들리가 없었다.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그녀를 직접 만나지도, 경험해 보지도 않은 서양인들에 의해 서태후의 이미지는 왜곡되고 날조되었다. 

1900년 7월 14일 프랑스의 < Le Rire> 풍자신문 1면에 실린 서태후 풍자화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들어서면서 봉건시대의 여성 권력자이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의 황후였던 서태후는 중국에서도 폄하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까지 중국에서는 서태후를 포함한 만주 황실의 무능과 사치가 청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망국의 책임을 홀로 떠안아야 했던 그녀는 누구보다도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한 인물이었다. 태평천국(太平天國) 이후 사회질서를 재건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지원했으며, 특히 여성 인권과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전족같은 악습을 폐하는 등 중국이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앞장섰다. 

궁정화가가 아닌 외부에서 온 서양인 화가에게 청나라 황실 초상화를 그리게 한 것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서양식’ 유화 초상화를 통해 그녀는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적인 군주와 변화하는 청제국의 모습을 만천하에 보여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같은 노력은 당시 큰 빛을 발하지 못했다. 

서태후가 사망한지 한 세기가 지난 오늘 중국 및 해외 학계에서는 그녀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1905년 서태후를 만난 휴버트 보스는 그때 이미 그녀의 참모습을 알았던 것일까.

그가 남긴 두번째 초상화 속 서태후는 당당하고 위엄있는 대청제국의 여성 통치자다. 백여년 전, 한 서양인 남성 화가의 눈에 비친 중국 황후의 모습은 아마도 정확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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