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세계사]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키는 암스테르담 민병대

렘브란트 판 레인(Rembrandt van Rijn, 1606-69), <야간 순찰>, 1642년, 캔버스에 유채, 379.5 x 453.5 cm,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간 순찰>은 단체 초상화의 혁신을 가져온 서양미술사의 걸작이다. 극적인 명암대비와 역동적인 구도, 생동감 넘치는 인물 묘사는 이전의 건조하고 정형화된 단체 초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미술사적으로 새로운 그림이다. 그리고 동시에 네덜란드 공화국(1588-1795)으로 열린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역사적인 그림이다.

단정하게 줄지어 있는 대원들을 묘사한 전통적인 단체 초상화 <미그르 연대>. 프란스 할스 & 피에르 코데, 1637년,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네덜란드 공화국은 스페인에서 독립한 북부의 7개 주(州)로 이루어진 연합공화국(Republiek der Zeven Verenigde Nederlanden)으로, 당시 군주제가 만연했던 유럽에서 왕과 귀족이 아닌 시민과 부르주아 계급이 주체가 되었던 사회였다. <야간 순찰>은 신생 공화국의 주역이자 네덜란드 ‘황금시대(Dutch Golden Age)’를 이끌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다.

16세기 네덜란드는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서 합스부르크가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1558년 스페인 왕위에 오른 펠리페 2세(Felipe II, 1556-98)는 스페인 왕 겸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부친 카를 5세(스페인: Carlos I, 재위 1516-56; 신성로마제국: Karl V, 재위 1519-56)로부터 상속받은 저지대 국가(현재 베네룩스 3국) 지방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신교도들을 탄압하는 등 압제정인 정책을 펼쳤다.

스페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는 빌럼 판 오라녜(Willem van Oranje, 1533-84)의 지휘로 반란을 일으키고 1581년 독립을 선언했으나, 남부 10개 주(현재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지역)가 다시 스페인 왕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북부 7개 주만이 통일 공화국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계속된 독립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네덜란드가 법적으로 완전한 독립국 승인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다.

스페인에 대항하여 네덜란드 독립을 주도한 빌럼 판 오라녜의 초상화, 1579년경,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렘브란트가 <야간 순찰>을 완성한 1642년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이 사실상 독립국으로 기능했던 시기다. 국내 정치적 안정을 토대로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이룩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는 바야흐로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네덜란드 공화국의 자유롭고 관용적인 문화를 따라 유럽 각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했으며, 특히 암스테르담은 다양한 배경의 이민자 유입으로 활력 넘치는 국제적인 대도시로 등극했다.

또한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 VOC)가 세계 최대 무역회사가 되어 동서양 무역을 주도하면서 막대한 부가 암스테르담에 모였다. 상업의 융성과 함께 문화예술도 활짝 꽃피었는데, 공화국인 네덜란드에서는 더 이상 군주나 귀족, 교회가 아닌 시민들이 작품을 주문하고 그들이 직접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다.

<야간 순찰>로 널리 알려진 이 그림의 원제는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과 빌럼 판 라위텐뷔르흐 부관이 이끄는 민병대’로, 작품 한가운데에 위치한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이 그의 오른쪽에 서 있는 빌렘 반 라위텐뷔르흐 부관을 선도하며 대원들을 불러 모으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그림 속에는 민병대를 상징하는 닭을 든 소녀를 제외하고, 바닝 코크를 비롯한 암스테르담 시민으로 민병대에 참여한 실존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새로 지은 화승총(arquebusier) 민병대 본부 건물 벽에 자신들의 초상화를 걸기 위해 당시 명성이 자자하던 렘브란트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그림 뒷쪽 성문에 걸려있는 방패에는 초상화에 포함된 대원 18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6세기, 스페인에 맞서 싸우기 위해 네덜란드의 각 도시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민병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평시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만 무장하여 소집하는 시민군으로 사용하는 무기에 따라 부대의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야간 순찰>이 그려진 시기에는 더 이상 전쟁을 위한 부대는 아니었고 정기적으로 거리 순찰을 돌거나 외국 귀빈 방문 시 의전행사 정도의 임무를 수행했다.

대부분 부유한 상인들로 이루어졌던 민병대는 엘리트 남성들의 지역 사교모임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을 지킨다는 의무감과 자부심이 충만했으며, 자신들의 삶과 업적을 기록하고 기념하고 싶어했다.

<야간 순찰>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프란스 바닝 코크(Frans Banninck Cocq, 1605-55) 민병대장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성공신화를 쓴 인물이다. 바닝 코크의 아버지는 독일 브레멘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해온 이민자였다. 약국을 운영해 비교적 풍족한 집안에서 자란 바닝 코크는 프랑스에서 법공부를 하고 네덜란드로 돌아와 1630년 암스테르담 시장(Burgemeester)의 딸(Maria Overlander, 1603-78)과 결혼한다.

바닝 코크의 장인(Volkert Overlander, 1570-1630)은 부유한 상인 출신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결혼과 함께 급속한 사회·경제적 지위 상승을 이룬 바닝 코크는 시의 주요 요직을 거쳐 1651년 암스테르담 시장직에 올랐다. 이민자의 아들에서 일개 시민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직 시장까지, 바닝 코크의 성공적인 삶은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야간 순찰>이 그려진 후 200년 동안 작품은 그리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1648년 네덜란드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공인되면서 민병대 존재의 이유가 사라졌고, 따라서 이런류의 단체 초상화도 더 이상 제작되지 않았다. 이 그림이 주목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9세기에 네덜란드 왕국이 성립되면서부터다.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 대륙의 재편을 위해 열린 빈 회의(Congress of Vienna) 결정에 따라 1815년 남부 네덜란드가 북부 네덜란드에 합병되었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신생 국가는 오라녜가의 후손인 빌럼 1세(Villem I, 재위 1815-40)를 네덜란드 연합왕국(Verenigd Koninkrijk der Nederlanden)의 초대 국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남북 지역 간에 내재하고 있던 갈등으로 1830년 남부 네덜란드(현 벨기에 지역)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결국 네덜란드와 벨기에, 독립된 두 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벨기에 혁명 이후 국가 정체성 확립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황금시대였던 네덜란드 공화국을 뒤돌아 보게 된다. 이 시기에 재발견된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은 그들에게 정치적·경제적 및 문화적·예술적으로 가장 찬란했던 네덜란드를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위대한 유산이었다.

1885년부터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야간 순찰>은 단연코 네덜란드의 보물 1호다. 17세기 공화정 시대의 암스테르담 시민들을 그린 그림을 보면서 21세기 입헌군주정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네덜란드 후손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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