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 세계사] 세상을 바꾼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

엘리자베트 루이즈 비제 르 브룅(Elisabeth Louise Vigée Le Brun, 1755-1842),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1783년, 캔버스에 유채, 89.8 x 72 cm, 독일 헤센 대공가 컬렉션

사치스럽고 화려한 패션으로 유명한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Antoinette, 1755-93)는 당대의 패션 아이콘이었다. 그녀가 입으면 유행이 되었고, 베르사유 궁정의 여인들은 물론 유럽 전역에서 그녀를 따라 했다.

그녀의 의도가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국내외 패션 산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왕비가 입고 유행시킨 수많은 패션 중 세상을 바꾼 옷은 다름 아닌 그녀의 가장 겸손하고 허세부리지 않는 옷이었다.

1783년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은 심플한 흰 면직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그렸다. <슈미즈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투아네트> 속 왕비가 입은 드레스는 얇은 천으로 만든 가볍고 느슨한 원피스로, 허리 뒤를 금색 리본 매듭으로 묶어 길게 늘여트렸다.

어떤 보석이나 장식구도 하지 않은 채, 오직 깃털과 리본으로 장식된 챙넓은 밀짚모자를 쓴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은 현대인에게 충분히 우아하고 품위있어 보인다. 이전 로코코 시대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초상화와 비교할 때 오히려 신선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왕비가 입은 소박한 흰 면직 드레스는 머지않아 전세계에 누구도 예견하지 못한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여러 겹의 풍성한 주름으로 장식된 궁중 드레스를 입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 엘리자베트 루이즈 비제 르 브룅, 1778년, 빈 미술사박물관

합스부르크 왕가의 공주이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80) 여제의 딸이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에 프랑스의 왕태자(미래의 루이 16세)와 결혼했다. 당시 베르사유는 극히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궁전으로 왕실과 궁정인들은 이에 걸맞는 예복을 입어야 했다.

왕태자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의 어떤 여인보다 호사스러운 차림을 할 수 있었고, 명실공히 베르사유의 패션 리더였다. 그러나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다양한 보조 기구를 입고 배와 허리를 졸라매는 궁정 드레스는 매우 무겁고 불편했다.

1774년 왕위에 오른 루이 16세(Louis XVI, 재위 1774-89)는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베르사유 궁전의 별궁인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을 선물한다. 그녀는 영지 내 당시 유행하던 영국식 정원을 꾸미고, 오늘날 ‘왕비의 마을(Hameau de la Reine)’이라 알려진 작은 촌락을 짓도록 했다.

베르사유 궁전 안에 있는 ‘왕비의 마을’. © Chateau de Versailles

엄격하고 호화로운 궁정 생활에 지친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티 트리아농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소박하고 조용한 전원생활을 자주 즐겼다. 이곳에서의 생활은 왕비의 의복 스타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녀는 뻣뻣하고 무거운 비단보다 가볍고 활동적인 모슬린(짜임새가 섬세하고 부드러운 평직의 면직물)을 선호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림 속 입고 있는 모슬린 드레스는 바로 그녀가 프티 트리아농에서 생활할 때 입던 비공식 일상 복장이었다. 왕비의 모슬린 드레스는 곧 궁정의 여인들에게도 전파되었지만, 베르사유에서와는 달리 그녀의 새로운 패션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폴리냑 공작부인(duchesse de Polignac)의 초상화. 엘리자베트 루이즈 비제 르 브룅, 1782년, 베르사유 궁전

1783년 살롱전(프랑스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개최한 미술전)에 출품된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를 본 관람자들은 흰 면직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이 대단히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왕실의 권위와 격식에 전혀 맞지 않는 복장이었으며, 왕비가 속옷(슈미즈, chemise – 어깨에서부터 허리 라인을 조이지 않고 일직선으로 내려오는 드레스 스타일로 피부와 바로 닿는 가장 안에 입는 아이템) 차림으로 국민 앞에 나타난 것과 다름 없었다.

드레스의 디자인과 함께 대중에게 충격을 준 것은 직물 자체였다. 드레스의 소재인 면화는 수입품으로, 당시 최상급 인도산 면직물이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값비싼 수입 면직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외국인 왕비의 애국심이 결여되어 있는 것과도 같았다.

빗발친 비난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는 곧 철거되었고, 비제 르 브룅은 대체 초상화를 재빨리 다시 그렸다. 같은 자세를 취한 푸른 회색빛 비단 드레스를 입은 왕비의 모습은 이전의 초상화보다 자연스러움은 덜하고 어느 정도 거리감이 느껴진다.

푸른 회색빛이 도는 프랑스산 비단 드레스를 차림의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 엘리자베트 루이즈 비제 르 브룅, 1793년, 베르사유 궁전

‘슈미즈 드레스’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의 패셔니스타들은 왕비의 드레스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흰 면직 드레스는 금세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 유행 아이템이 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한번 패션 리더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793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이후 그녀의 슈미즈 드레스는 본격적으로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비단 산업은 불황을 맞게 되는데, 국내외 안팍으로 면직물이 유행하면서 수요가 급격하게 즐어든 것이다.

혁명이 계속되면서 면직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생각도 완전히 바뀌었다. 자국의 비단 산업을 붕괴시키는 주범이라고 믿었던 면직물은 이제 애국적인 것이 되었다. 이들에게 왕실 가족과 귀족들이 입던 비단과 벨벳은 앙시앙 레짐(Ancien Régime)의 산물이었다.

이와 더불어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 부흥을 꾀한 계몽주의의 확산은 복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흰 민무늬 드레스는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디자인이 되었으며, 면직물은 비단을 뛰어넘는 최고의 유행 직물이 되었다.

계몽주의 영향으로 당시 유행한 고대풍의 흰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레카미에 부인(Madame Récamier)의 초상화. 자크 루이 다비드, 1800년, 루브르 박물관

그러나 인도산 면화와 면직물은 더 이상 대량의 수요를 맞출 수가 없었다. 이에 유럽인들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새로운 공급처를 찾았고, 미국 남부에 대규모 면화 플랜테이션을 조성한다.

1793년 엘리 휘트니(Eli Whitney, 1765-1825)가 조면기(cotton gin)를 발명하면서 미국의 면화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기술적인 진보는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더욱 성행했다. 면직 생산량이 매년 증가함에 따라 미국으로 유입되는 노예 인구도 해년마다 가파르게 증가했다. 날로 번창했던 미국의 면화 산업은 노예제를 19세기 중반까지 존속시켰고 인류의 역사에 지울 수 없은 오점을 남겼다.

조면기로 목화씨와 솜을 분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백인 농장주들을 묘사한 삽화, 1869년, 미국 의회도서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단순한 흰 면직 드레스가 가져온 나비 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1783년 어느날, 누구보다 화려했지만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왕비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순간, 옷장에서 꺼낸 드레스 한 벌의 선택이 가져올 미래를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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