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명품순례] 17세기 유럽에 온 일본 미녀들 – 가키에몬 채색자기 여인상

<가키에몬 비진>, 1670-90년경, 자기, 일본 아리타, 높이 39.3 cm(좌) ; 38.4 cm(우), 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

네덜란드 프린세스호프 국립도자박물관(이하 도자박물관)에는 일본에서 온 한 쌍의 자기 인형이 있다. 호화로운 복장을 하고 곱게 단장한 두 여인은 입가에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관람객을 반긴다. 이곳에서 그녀들은 ‘가키에몬 비진(美人)’이라 불리운다.

도자박물관이 소장한 자기 인형이 정확히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서 유럽에 오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17세기 후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배에 실려 유럽으로 왔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이 여인들은 누구일까. 화려한 치장으로 보아 지체 높은 상류층 집안 여성은 아니다. 이들은 유곽(遊廓)에서 일하는 여성, 아마도 고급 유녀(遊女)일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유럽인들에게 여인들은 단지 멀리 바다를 건너온 이국적인 여성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눈에는 잘 차려입은 왕실이나 귀족 여인으로 보이지 않았을까. 

두 여인은 같은 형태의 고소데(小袖)를 여러 벌 겹쳐 입고 있다. 기모노의 전신인 고소데는 소맷부리가 좁은 형태의 옷으로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7) 기본 의복이었다. 고소데 가장 위에는 검은색 오비(帶, 허리 부분에서 옷을 여며주는 띠)를 두르고, 다양한 색과 무늬로 장식된 긴 겉옷을 걸쳐 입었다.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작은 발에는 다비(足袋, 일본의 전통 버선)를 신고 있다. 여인들의 머리는 고리를 만들어 틀어올린 형태의 하나인 고쇼마게(御所髷, 궁녀의 머리모양에서 유래한 스타일)로 꾸몄다. 이러한 여인들의 차림새는 17세기 후반 간분(寬文, 1661-73) 연간에 유행한 것으로, 자기 인형의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머리에 고쇼마게를 하고 단풍과 부채가 장식되어 있는 겉옷을 입고 있는 여인(좌). © Bonhams
머리에 고쇼마게를 하고 줄무늬, 원무늬와 함께 등나무 잎이 그려진 겉옷을 입고 있는 여인(우). © Bonhams
여인들이 입고 있는 옷은 17세기 후반에 발행된 고소데 히나가타본(小袖雛形本, 고소데 문양을 모은 일종의 패션북)을 참고하여 디자인한 것으로 보인다. <온 히나가타>, 1667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에도 시대에는 조닌(町人)이라고 불리는 도시의 상공인계층이 부상하여 일본의 사회, 경제, 문화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본래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계층에 속한 이들은 17세기 중후반 부를 축적하면서 일본 내의 영향력 있는 새로운 사회계층으로 성장했다.

조닌 문화는 뜬구름 같은 쾌락적 삶을 즐기고자 하는 세속적인 문화였다. 이러한 사회적인 풍토인 ‘우키요(浮世, 덧없는 세상)’가 확산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유흥 문화가 형성되고 유곽이 발달하게 된다.

에도(현 도쿄)의 요시와라(吉原)와 교토의 시마바라(嶋原)는 당시 가장 유명한 유곽이었다. 이곳의 여인들(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남성배우 포함)은 화려한 옷을 차려있고, 곱게 화장을 하고, 최신 유행의 머리 스타일로 치장했다. 이들은 패션 아이콘이자 트렌드 세터로서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에게도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편 유녀들은 에도 시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이기도 했다. 간분 연간부터 이들을 주인공하는 미인화(美人畫)가 활발하게 제작되었는데, 그림 속 여인들은 남성들의 몽상을 담은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간분 연간에는 무채색의 장식 없는 배경에 단독으로 여인을 그린 미인화가 유행했다. <간분 미인화>, 17세기 후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유곽의 여인들을 우키요에(浮世繪) 목판화에도 등장한다. 17세기 후반 우키요에는 히시카와 모로노부(菱川師宣, 1618?-1694)의 단색판화 작품을 시작으로 크게 발전했다. 우키요에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모로노부는 에도의 요시와라 유곽과 유녀들을 묘사한 그림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히시카와 모로노부의 단색 목판화 <요시와라의 모습>, 17세기 후반, 동경국립박물관

도자박물관의 ‘가키에몬 비진’ 또한 이러한 사회·문화적 배경 아래 제작되었을 것이다. 여인상이 누구를 위해,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미인화와 우키요에처럼 유녀를 형상화 한 자기 인형은 남성들이 꿈꾸는 판타지를 제공했음에 틀림없다. 자기 인형을 감상하면서 남성들은 아리따운 유녀들과 보낸 황홀했던 밤을 떠올렸을 것이다. 유곽에 가고 싶지만 여유가 없는 자들은 미래를 기약하며 자기 인형을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우윳빛이 도는 따뜻한 흰색 자기 표면에 밝고 선명한 채색안료로 장식된 여인상은 가키에몬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가키에몬 비진’은 바로 자기 인형의 장식기법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도공 사카이다 가키에몬(酒井田柿右衛門, 1596-1666)이 개발했다고 알려진 이 채색자기는 1650년경 사가현의 아리타(有田) 근교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1659년부터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를 통해 유럽으로 수출되었으며, 현지인들은 유백색 바탕에 화사한 색채로 그려진 가키에몬 자기에 매료되었다.

1670년대에 이르러 기술적으로 완성된 가키에몬 양식이 확립되고 유럽으로 수출이 본격화되면서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는 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다. 특히 자기 인형은 유럽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상품으로 17세기 후반부터 제작된 대다수가 유럽에 왔는데, 여인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그녀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이도, 직업도, 신분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온 몸을 감싼 옷을 입은 여인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화류계 여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데다가 관능적이지도 않았다. 여인들은 그들에게 이국적인 동양 여성이었을 뿐이다.

17세기 후반 동양의 자기는 더이상 유럽에서 새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동인도회사를 통해 대량 수입되면서 자기(일반적으로 청화자기)는 중산층이라면 큰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었다. 그러나 화려하게 채색된 가키에몬 자기는 누구나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특히 여인상과 같은 조각품은 오로지 권세 있고 부유한 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귀하고 비싼 것이었다.

영국 벌리 하우스(Burghley House)에 있는 ‘스모선수’, 1670-85년경. 가키에몬 자기 인형 초창기 수집품으로 1688년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영국 벌리 컬렉션
동아시아 자기가 진열되어 있는 방 내부 모습을 그린 판화, 1712년경. 가키에몬 자기 인형이 당시 유럽의 궁전과 대저택에서 어떻게 전시되었을지 보여준다.

‘가키에몬 비진’은 2016년 도자박물관이 구입한 후 같은 해 열린 특별전 ‘섹시한 도자기 Sexy Ceramics’에 출품되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이후 상설전시실로 옮겨져 현재 동아시아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가키에몬 비진’이 전시된 도자박물관 동아시아 전시실. © HEEstoryNArt

17세기 유럽에 온 일본 미녀들은 여전히 아름답고 화려한 자태로 21세기 관람객을 유혹한다. 이그조티즘(exotism)과 에로티시즘(eroticism) 그 사이 어디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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