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숨은 이야기] 헨리 8세를 유혹한 초상화의 진실 – 클레페의 앤

소(小)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1497-1543), <클레페의 앤>, 1539년경, 캔버스 위 양피지에 유채와 템페라, 65 x 48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영국 역사에서 헨리 8세(Henri VIII, 재위 1509-47)와 여섯 명의 왕비만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을까. 첫 번째 왕비(아라곤의 캐서린)와 이혼하고, 두 번째 왕비(앤 불린)는 처형시키고, 세 번째 왕비(제인 시모어)가 출산 후 사망하자 헨리 8세는 네 번째 왕비를 찾아나선다. 

소(小) 한스 홀바인, <헨리 8세의 초상>, 1540년, 로마 바르베리니 국립고전미술관

당시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를 설립한 헨리 8세는 가톨릭 대국인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에 맞서 유럽 외교무대에서 잉글랜드의 입지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개신교 국가와 정치적 동맹을 맺는 일은 무엇보다 시급했다. 게다가 왕자(미래의 에드워드 6세)가 하나뿐이었던 왕은 후계 문제를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교 국가인 클레페 공국의 공주 앤(Anne of Cleves; 독일어: Anna von Kleve, 1515-57)은 유력한 왕비 후보였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헨리 8세에게 신부의 외모는 정치적 계산 못지않게 중요했다. 한 번도 앤을 만나보지 못한 왕은 독일 출신의 궁정 화가 한스 홀바인을 클레페로 보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잉글랜드로 보내도록 명령했다. 지난 세 번의 결혼과 달리 신부와 대면하지 않고 하는 결혼이었기에 홀바인의 임무는 어느 때보다 막중했다. 

홀바인은 앤의 아름다운 초상을 그렸다. 균형 잡힌 우아한 자태에 화려하지만 기품있는 옷차림과 장식까지. 초상화를 본 헨리 8세는 앤의 모습에 매우 흡족했다. 결혼은 성사되었고, 공주는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 왔다. 그러나 그녀를 직접 본 왕은 공주의 못생긴 외모에 실망했다.

이 일화는 영국 역사 속에서 수 백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이야기다. 하지만 홀바인이 그린 앤의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자꾸 의문이 든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초상화가로 평가받는 화가는 정녕 공주를 미화했을까? 

그림 속 클레페의 앤은 붉은색과 황금색이 어우러진 벨벳 드레스를 입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보석으로 치장된 공주의 의상과 머리장식은 정교하고 세심하게 묘사된 반면, 표정 없는 얼굴은 다소 밋밋하고 눈매는 흐릿해 보인다. 

홀바인은 클레페의 앤을 이상화된 아름다운 르네상스 여성으로 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범한 외모를 지닌 공주의 실제 모습과 차분한 성품이 초상화에 드러나도록 정확한 묘사에 최선을 다했다. 

홀바인이 똑같은 목적으로 헨리 8세를 위해 그린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공주의 초상화와 비교하면 더욱 명확하다. 이 초상화에서 크리스티나는 장식이 전혀 없는 검은색 상복을 입고 있지만 매혹적인 눈빛과 알 수 없는 미소로 보는 이를 유혹한다.

소(小) 한스 홀바인, <덴마크의 크리스티나>, 1538년, 런던 국립미술관

홀바인이 공주의 모습을 미화시켜 그림으로써 얻는 대가는 무엇일까. 이미 헨리 8세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국제적인 명성을 쌓은 화가가 그런 무모한 일을 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더군다나 초상화를 주문한 사람은 클레페의 앤이 아닌 헨리 8세이므로, 홀바인은 의뢰인의 요구에 따라 공주의 실제 모습과 가까운 초상화를 그렸어야 하지 않을까. 

홀바인의 초상화가 헨리 8세의 결혼 결정에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는 미비하다. 왕이 크리스티나의 초상화를 보고 기뻐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앤의 초상화에 대한 반응은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앤의 실물을 보고 대노했다는 헨리 8세는 홀바인을 처벌하지 않았다. 왕의 미움을 산 건 앤을 적극 추천했던 총신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 1485-1540)이었다. 

소(小) 한스 홀바인, <토마스 크롬웰>, 1532-33년, 뉴욕 프릭 컬렉션

헨리 8세가 클레페의 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은 건 사실이나 그녀의 외모를 비하하는 것이 유행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왕이 앤을 ‘플랑드르의 암말’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도 17세기에 처음 등장한다. 

헨리 8세는 정략결혼보다 연애를 해서 스스로 신부감을 고르는 스타일이었다. 앤과의 결혼은 정치적이었을 뿐더러 왕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실물을 보지 않고 하는 결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외모는 차치하고라도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잉글랜드 궁정의 법도도 잘 알지 못하며, 세련된 르네상스 여성으로서 갖춰야 할 교양도 부족했던 앤은 헨리 8세에게 매력적인 여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1540년 1월, 결혼식은 예정대로 열렸고 앤은 헨리 8세의 네 번째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6개월 만에 왕은 결혼 무효를 주장하며 앤에게 이혼을 통보한다.  

현명했던 앤은 기꺼이 이혼에 동의했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헨리 8세는 그녀에게 ‘왕의 사랑받는 여동생(The King’s Beloved Sister)’이라는 명예로운 호칭과 함께 잉글랜드 정착 생활을 위한 영지와 후한 연금을 하사했다. 

이후 헨리 8세 궁정의 각종 행사에 참석하고 왕의 자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앤은 1557년 7월 런던에서 사망한다.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 캐서린의 딸이었던 메리 1세(Mary I, 재위 1553-58)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앤의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 후 그곳에 그녀의 시신을 안치했다. 헨리 8세의 여섯 왕비 중 영광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왕비는 앤이 유일하다.

헨리 8세의 왕비 가운데 제일 짧은 재위 기간을 가진 비운의 왕비로 알려진 클레페의 앤. 그러나 왕의 그 어떤 아내보다 성공한 삶을 산 여인은 그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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