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그림]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후작부인’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70), <잔느 앙투아네트 푸와송, 퐁파두르 후작부인>, 1750년, 캔버스에 유채, 81.2 x 64.9 cm, 하버드대학교 포그 미술관

프랑스 루이 15세(Louis XV, 재위 1715-74)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후작부인(Marquise de Pompadour, 1721-64)이 남긴 수 점의 초상화 중 나는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화장하는 부인의 초상화를 특별히 좋아한다.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대가였던 부셰의 정교한 디테일과 세련된 색감으로 완성된 작품 자체의 수준도 매우 뛰어나지만, 무엇보다 이 그림이 나를 매료시키는 이유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 뒤에 감취진 그녀의 야심과 영리함 때문이다.

본명은 잔느 앙투아네트 프와송(Jeanne-Antoinette Poisson). 퐁파두르 부인은 파리 부르주아 출신으로 빼어난 미모와 함께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춘 여성이었다. 스무살에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아 평범한 삶을 영위하던 그녀의 운명은 1745년 왕실의 가면 무도회에서 루이 15세를 만남으로써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같은 해 왕은 그녀를 데려다가 베르사유 궁전에 정착하게 하고, 남편과 이혼을 시킨 후 퐁파두르 후작부인 작위를 내렸다.

이 초상화가 그려진 1750년은 퐁파두르 부인 삶의 또 다른 변곡점을 맞이하는 시기였다. 1745년 평민 출신으로 궁정에 들어와 왕의 정부로서 살던 부인은 더 이상 왕과의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다. 원래 허약한 체질이었던 그녀의 건강이 서른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나빠졌을 뿐 아니라, 여자를 좋아했던 루이 15세의 정부로 사는 시기 또한 길지 않았다. 총명하고 지혜로웠던 후작부인은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왕의 여인보다는 필요불가결한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다.

1950년부터 1764년 마흔 셋의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퐁파두르 부인은, 더 이상 왕의 정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루이 15세에게 이전보다 더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성과 교양으로 무장한 그녀는 왕의 조언자, 조력자로서 정치와 인사에 깊이 관여했으며,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부셰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와 작가를 후원했고, 1756년 세브르 도자기제작소 설립을 주도해 프랑스 도자기 산업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또한 루이 15세 광장(현 콩코르드 광장)을 비롯한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장려했으며, 계몽주의 철학에도 관심을 가져 <백과전서> 편찬 지원에 힘을 쓰는 등 18세기 프랑스 문화 황금기를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후작부인>, 1756년, 캔버스에 유채, 201 x 157 cm, 뮌헨 알테 피나코텍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Maurice Quentin de La Tour, 1704-88), <퐁파두르 후작부인>, 1752-55년, 종이에 파스텔, 177.5 x 131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퐁파두르 부인이 남긴 초상화 중에는 우아하고 지적이며 기품있는 그녀의 매력을 극대화한 작품이 많다. 후작부인의 문예적 소양과 세련된 취향이 돋보이는 여타 초상화와는 달리 부셰는 이 그림에서 그녀를 곱게 치장하는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그녀의 초상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루이 15세의 두상이 조각된 화려한 카메오 팔찌를 오른손목에 차고서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는 퐁파두르 부인의 모습은 그녀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세지다. 왕의 정부로서의 삶은 끝나지만 왕과의 끈끈한 관계는 계속되고 더욱 깊어지리라.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그녀의 의지는 강렬하고, 그래서 이 그림은 더욱 매혹적이다.

20년 동안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퐁파두르 부인은 폐질환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장례에 참석할 수 없었던 루이 15세는 베르사유 궁전 발코니에 홀로 서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녀는 성공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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